본문 바로가기
책 이야기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리더쉽.

by unicz 2022. 5. 3.

4명의 대통령의 리더십을 배워보자 -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링컨과는 다르게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콜롬비아대 법학대학을 다니고 아버지의 재력 그리고 아버지와 가문의 후광으로 인해 루스벨트 지역 유지의 추천 으로 링컨과 같은 23세 나이에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어도어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행운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어도어는 자신이 정계로 발을들이게 된게 천부적인 재능이였는지 아니면 야망과 근면성실함 그리고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건지 질문에 두번째 유형의 성공을 연구하는게 더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시어도어는 어렸을때 부터 아버지의 노력으로 책도 쉽게 구하고 쉽게 자기개발을 할 수 있는 조건에 있었고 개혁을 위해 앞장서며 전투적으로 리더쉽을 발휘하는 아버지는 보고 배워 시어도어가 성장하는 과정에 큰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시어도어는 정치계에 입성한 후에도 거침없이 행동했는데 정치를 선과 악이 다투는 그 장으로 보았고 재성까지 하면서 소장파 리더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연이은 성공으로 오만해 지도 자기만족에 빠저들게되었는데요. 하지만 주변인물들이 떠나가며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되고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던 시어도어는 세번째 당선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약점 신체적결함 그리고 오만함과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버리고 그 두려움까지 인정하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 끝에도 시어도어에게 큰 시련이 주어졌는데요. 25세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아내가 같은날에 연이어 죽임을 당하는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시어도어의 일기에서는 빛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고 말했고 자신의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슬픔을 잊기 위해 일에만 몰두하게 되지만 일은 잘 안되고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고 이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코다의 목장으로 향합니다.

 

다코다 목장에서 시어도어는 카우보이로 살게됩니다. 이는 시어도어가 자신의 상심한 마음과 두려움을 마주하고 자신이 진정한 리더가 될수 있는 발돋음을 할 수 있게 하는 시기였고 2년의 방황뒤 시어도러는 우울증을 회복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되찾았으며 천식으로 고생하던 몸도 많이 튼튼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떨어지고 연방직 인사위원에 임명되어 6년을 근무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군성 차관보직을 제안받지만 미국 스페인전쟁이 발발해 육군으로 자원입대합니다. 이전쟁을 자신의 인내와 의지를 시험하고 자신의 리더십을 보여줄 무대로 삼았습니다. 시어도어는 연대장이라는 직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고 다른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밑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육군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전역후 뉴욕주지사 선거에 도전해 결국 당선이 됩니다.

 

뉴욕주지사에 재임해 링컨의 협상력을 높이 평가해 인용하였고 시민의 인지도가 높아지자 시어도어를 야망의 묘지라 불리는 부통령의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부통령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였고 그당시 대통령인 맥킨리 대통령은 시어도어에게 아무런 조언도 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어도어는 우울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1901년 9월 6일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최연소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되게 됩니다. 

 

시어도어는 정계에 발을 들이면서부터 온갖 정치에 시달려 올라왔고 맥킨리 대통과 다른 정치색을 보인 시어도어를 온국민이 알게 되었고 그의 진취적인 기상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 다방면의 뛰어난 능력으로 시민들의게 삶의 활력을 주었다고 하는 기사가 나올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어도어는 1902년 탄광파업이라는 큰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탄광파업은 노동자와 관리자의 싸움이였고 민간차원의 문제여서 정부가 관여하기는 쉽지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것과는 무관하게 헌법과 법률에서 명확이 금지하더라고 국민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하는 것이 행정부의 권리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한 시어도어는 미국역사의 가장 재앙적인 163일간의 탄광파업을 평화롭게 해결하였습니다. 시어도어는 국민의 대리인으로 섰으며, 노동과 자본간의 분쟁이였지만 석탄파업은 국민의 삶과 건강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에 영향을 미쳤고 이를 정부에서 해결하지않는다면 정부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 라며 공익의 관점에서 해석해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어도어의 리더십은 공평정책이라는 깃발아래 진보 개혁이 미국 전역을 휩쓸며 노동과 자본의 관계 그리고 정부와 국민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았다고 말합니다.

 

 

 

4대 대통령의 리더십을 배워보자 - 프랭클린 루스벨트

프랭클린은 앞에 링컨과 시어도어와는 다르게 야망을 감추고 살았습니다. 특권계급의 자녀로서의 길을 그대로 걸어 프랭클린은 20대 후반의 나이까지도 변호사 직업이외에 특별한인상을 주지 못하고 살았는데요. 그러던중 주의원 출마를 제안받고 숨겨져 있던 야망을 밖으로 표출하게 됩니다. 평소 현실에 안주하는 듯하 겉모습 뒤에는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과 모험에대한 갈망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프랭클린은 자신감 넘치고 사교적이며 낙천적인 기질이 프랭클린이  리더로서 성공한 요인이라고 뽑았습니다. 또한 무난한 특권자녀로서의 길은 자신의 세상의 중심이라는 특권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상황에 적합 하도록 잘 적응 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프랭클린 역시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고 남다른 분석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지능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언어 구사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만의 공부방식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지식과 지능 문제해결능력 거기에 치밀함 까지 보여주었는데 이능력들은 평생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프랭클린은 시어도어에게 기회가 오면 놓치지않고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바있고 시어도어가 갔던 길을 대략적으로 밟아갔습니다. 정계에 진출한프랭클린도 시어도어와 같이 오만함에 빠졌지만 그과정에서 협력과 리더십의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되었습니다. 프랭클링은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제약을 피해 가는 유연한 기법을 이용해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미심쩍은 방법도 과감히 시도하는 적극성이 있었고 38세의 어린나이에 부통령 후보로 지명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로인해 프랭클린은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1921년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리고 큰 고난일 겪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링컨과 시어도어의 사례처럼 프랭클린도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유의미한 성장을 하며 야망도 더욱 굳건히해 리더십 능력향상과 시행착오를 효과적으로 해결해나갔습니다. 그는 7년간 꾸준히 요양하며 정치적희망을 상실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죽게될것이고 그러면 지적,인격적으로도 사망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정치적꿈을 유지하고자했고 치료법을 꾸준히 찾아다녔습니다. 

 

1928년 뉴욕주지사 출마압력에 출마해 승리를 거두었고 그다음해 미국은 대공황이 오게 됩니다. 프랭클린은 항상 구체적인 불만, 고충에서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고 1931년 뉴욕 주의회에 주정부가 지원하는 실업보험 프로그램을 통과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지원은 미국의 진취성을 훼손하며 결과적으로 문제가 악화될것 이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에 경제적 여건이 좋은 운좋은 시민들에게 과세를 해서 실직한 시민에게 공공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래도 안되면 공적자금으로 실업급여를 제공하자고 제안하고 공화당 지도자들은 이방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통과되었습니다. 이로인해 프랭클린은 민주당 개혁파의 대변인으로 급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2년 4월 라디오 연설을 한 프랭클린은 경제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잊힌 사람들에게 다시한번 믿음을 주자 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렇게 프랭클린은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 지명을 받고 변화된 상황을 유연하게 맞춰가며 이용하는 프랭클린은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됩니다. 현시대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프랭클린이 대통령이 되는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그는 취임사에서 낙관주의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 보다는 현실은 인지하고 두려움을 받아들이는게 이시기를 넘길 수있다고 말하며 국민의 선택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며 강력한 리더쉽고 방향제시로 국민의 요구를 수행해 보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또한 국민의 돈으로 투기하는 관례를 끝내고 국민에게 건전한 유통환경을 제공하고 주택과 농장의 압류를 방지하겠다고 약속하며 철저히 실용주의적인 행동으로 뒷받침 되었습니다. 얼마후 프랭클린은 미국을 두려움과 공포로 덮혀있던 은행위기를 점차 해결해 나갔고 이과정에서 나온 정책을 뉴딜정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회생의 예술가로 칭했다고 합니다.

댓글